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디라키움 공방전 (문단 편집) === 개요 ===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 공작 로베르 기스카르는 전임 황제들과의 혼담을 핑계로 약해진 로마 제국에 대한 패권을 주장했다. 이피로스 지방의 디라히온은 옛부터 서방 세력들이 제국을 침탈하기 위해 거치는 가장 주요한 지대였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1070년대 이미 교황을 윽박질러 아풀리아와 남이탈리아 전역의 지방을 공식적으로 장악했고, 방해되는 시칠리아의 에미르들도 격파한 상태였다. 1071년 그는 결국 로마의 마지막 이탈리아 영토인 바리를 함락시키면서 그의 지위를 공고히 하게 된다. [* 그러나 아직 현지 귀족들과 그리스인들이 대부분인 사회는 노르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노르만 지배자에 대한 항쟁이 100년 가까이 지속된다.] 하지만 로베르의 야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지역은 당시에 당연히 로마의 영토로 인식되는 지역이었고, 로베르는 이 곳을 점령했으니 황위 계승에 끼어들 최소한의 껀덕지를 얻어낸 셈이였다. 후임 [[두카스 왕조]]의 무능한 황제들이 그에게 로마 작위와 훈장을 수여하고 그가 휘하 노르만인들에게 로마식 수여식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자, 그의 야망은 더더욱 동하였다. 그러던 1073년,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동방 황제 [[미하일 7세]]가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자신의 황자 한명과 기스카르의 딸을 결혼시키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는 당연히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당시 로마 제국의 복잡한 정치 상황이 이를 가로막았다. 미하일 7세가 [[니키포로스 3세]]에게, 니키포로스 3세는 [[알렉시오스 1세]]에게 각각 찬탈당하면서, 로베르의 혼담은 흐지부지 되었고, 그의 딸과 결혼하려 했던 콘스탄티노스 왕자는 유폐되었다[* 니키포로스 3세 재위기 한정.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는 콘스탄티노스를 수도로 다시 복귀시켰다.]. 로베르의 딸 헬레나는 이미 [[두카스 왕조]]의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와 결혼하기 위해 로마 제국으로 향했지만, 결국 그녀가 니키포로스 3세에게 끌려다니게 되면서 헬레나의 거취도 불안정하게 되었다. 1081년이 되자 로베르는 딸 헬레나가 제국 황궁에서 제대로 된 예우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방 제국의 서부 변방을 유린하기 시작한다. [[동로마 제국]]은 만지케르트 전투의 후유증을 제대로 극복하지도 못한 채 당대 최고의 전사 집단, 노르만 족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